보도자료

[소년한국일보] 권리 주체로서 아동의 자세

2008-01-02

얼마 전 도심 한가운데 있는 한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단지에는 나이 많은 어르신과 맞벌이 부부, 한 부모 가정이 많았습니다.
이 지역 복지관에슨 학교를 마친 아이들을 돌봐 주는 '나눔과 돌봄의 방'이라는 방과후 공부방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네 아이들 대부분이 아주 어릴 때부터 이 곳에서 함께 뛰놀고 공부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었지요.

이 날도 경수는 학교가 끝난 뒤 여느 때처럼 공부방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다가 길가에 버려진 라면 박스 안에서 낡은 부엌칼 하나를 발견했어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경수는 그 칼을 주워 실내화 가방에 얼른 넣었지요. 그리고 부지런히 복지관으로 달려갔답니다.

숙제를 마친 뒤 아이들은 간식을 먹으면서 자유롭게 놀았어요. 담당 사회 복지사 선생님이 사무실에 볼일을 보러 잠깐 내려간 사이 아이들은 말타기놀이를 하며 놀았어요. 그런데 경수에게는 일이 잘 안 되는 날이었나봐요. 가위 바위 보에서 지는 바람에 세 번을 연거푸 말이 되어야 했어요. 친구들은 사정없이 경수의 등에 올라탔어요.

두 번 까지만 해도 견딜 만 했는데 세 번째는 정말 주저앉고 싶었지요. 그래도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데, 친구들이 "바보 멍청이!"이라고 놀리는 바람에 화가 났답니다. 세 번이나 가위 바위 보에서 져 말이 된 것도 기분이 나쁜데, '바보'라는 놀림까지 받았으니 화가 날 만도 했겠지요.

화가 치밀어 오른 경수는 등에 올라탄 아이들 모두룰 주먹으로 때려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친구 모두를 당해내기는 힘들다는 걸 금방 깨달았지요. 그 순간 경수는 실내화 가방에 들어 있는 식칼이 생각났습니다. 경수는 식칼을 꺼내 공중에 휘둘렀어요. 친구들은 녹슨 칼을 보자 모두 놀라서 달아났습니다.

그 주 토요일에 열린 '아동 회의'는 당연히 '경수의 식칼 사건'으로 떠들썩했습니다. 회의가 시작되자 어린이들은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서로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어요. 진지하게 의견을 나눈 끝에 아이들은 이 사건의 원인을 '어른들의 잘못'으로 결론 내렸어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위험한 물건을 길거리에 생각없이 버린 어른들이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물론 호기심으로 그 위험한 물건을 주워서 친구들을 위협한 경수의 잘못도 크다고 인정했습니다.

회의는 자연스럽게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논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이들은 먼저 자신들이 위험한 환경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을 어른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는 곳에 포스터를 그려 붙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곁에서 회의를 지켜 본 사회복지사와 자원 봉사 어머니들은 속으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아동들의 활동을 어른들이 무시하면 어쩌나 해서요.

그런데 경수네 동네에는 아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답니다. 우선 포스터를 붙이는 일을 돕는 어른들이 생겨났어요. 아동 보호에 참여하겠다는 서명 운동을 시작하자, 많은 어른들이 서명하며 격려해 주었어요. 어른들이 캠페인에 나서기도 했답니다. 아이들은 신이 났어요.

자기들이 사는 동네 뿐 아니라 이웃 아파트에 가서 함부로 버려진 위험한 물건을 줍기 시작했어요. 엄청난 양의 위험한 물건들이 모아졌습니다. 주운 물건들을 어른들에게 보여 주며 어린이 피해 사례도 알렸지요. '아동이 안전한 세상'을 만들자는 운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경수의 식칼 사건이 계기가 되어, 아이들은 동네에서 훌륭한 시민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아무도 이들을 더 이상 어린 아이라고 무시하지 않게 되었답니다.

유엔 아동 권리 협약 제13조에는 '아동들은 자기의 의견을 표현하고 정보를 얻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정보와 생각을 알릴 권리가 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권리의 주체인 어린이 스스로가 아동 권리에 대한 생각과 의견을 밝히는 것 역시 아동의 권리를 증진시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아동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나 사회, 부모님의 노력뿐 아니라 권리의 주체인 아동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새해에는 어린이 여러분 모두가 자신들의 권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김인숙(세이브더칠드런 부회장ㆍ중앙 아동 권리 센터 소장)